사랑한 여인이 남기고 간 붓글씨
사랑한 여인이 남기고 간 붓글씨
죽은 자가 남긴 마지막 경고, 피 묻은 붓글씨의 비밀 (출처: 청구야담)
태그 (2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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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50자)
꿈처럼 나타난 절세미인과의 하룻밤, 운명이라 믿었던 뜨거운 사랑. 하지만 여인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서책상 위엔 섬뜩한 핏물로 쓰인 경고만이 남아있었다. 이것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목숨을 노린 치명적인 유혹이었을까.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남긴 마지막 서찰, 그 피 묻은 진실이 지금 밝혀진다.
디스크립션 (300자)
조선시대 기담집 '청구야담'에 실린 이야기. 한적한 밤, 글공부에 매진하던 선비에게 찾아온 미스터리한 여인.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홀연히 사라져 버립니다. 그녀가 남긴 유일한 흔적은 피로 쓰인 섬뜩한 경고문. 그녀의 정체는 무엇이며, 선비에게 닥쳐올 위험은 과연 무엇일까요? 한 남자의 목숨을 구한 애절하고도 기이한 사랑 이야기.
※ 운명적인 만남
때는 조선 후기, 달빛마저 구름 뒤에 숨어 유난히 칠흑 같던 여름밤이었다. 한양 변두리, 남산 자락에 위치한 작은 초가집에서는 늦은 시간까지 희미한 등불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집의 주인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선비, 김진서. 가문은 한미했으나 명석한 두뇌와 수려한 용모로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터라, 다가올 과거 시험을 위해 밤낮으로 책과 씨름하는 중이었다. 사방이 숨을 죽인 듯 고요하고, 오직 그의 서재에는 책장 넘어가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만이 나지막이 울렸다. 한참 동안 붓을 들고 서책에 주석을 달던 김진서는 뻐근해진 목을 주무르며 잠시 허리를 폈다. 창호지 너머로 보이는 밤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먹물처럼 까맸다. 그때였다. 그 정적을 깨고 어디선가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처음에는 바람 소리인가, 혹은 고양이의 울음소리인가 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 소리는 틀림없는 사람의 울음소리였다. 그것도 보통의 곡소리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다 짊어진 듯, 애절하고 처연하여 듣는 사람의 간장마저 녹여 내리는 듯한 울음소리. 김진서는 자신도 모르게 붓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깊은 밤에 웬 여인이 외딴 초가집 근처에서 저리도 서럽게 운단 말인가. 혹시 무슨 변고라도 당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길이라도 잃은 것인지. 선비의 의협심이 발동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밤이슬을 머금은 축축한 공기가 그의 뺨을 스쳤다. 울음소리는 그의 집 뒤뜰, 작은 대나무 숲이 시작되는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등불 하나를 손에 들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대숲 어귀에 다다랐을 때, 그는 숨을 멈췄다. 그곳에는 소복 차림의 한 여인이 달빛이 아닌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모습으로 서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김진서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등불 빛에 드러난 여인의 얼굴은 그가 평생 보아온 그 어떤 미인도, 그림 속의 선녀도 무색하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희고 고운 피부는 마치 옥을 깎아놓은 듯했고, 슬픔을 머금은 커다란 눈망울은 밤하늘의 별을 모두 담은 듯 깊고 영롱했다. 붉고 도톰한 입술은 금방이라도 애달픈 사연을 토해낼 것만 같았다. "뉘시오? 이 깊은 밤에 어인 일로 여기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오?" 김진서는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었다. 여인은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그의 단정한 선비 차림새와 온화한 인상을 보고는 조금 마음을 놓은 듯했다. "저는… 길을 잃은 나그네이옵니다. 갈 곳 없는 처량한 신세가 서러워 저도 모르게 눈물을 보였습니다. 행여 나리의 밤을 방해한 것은 아닌지 송구스럽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맑고 청아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짙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김진서는 측은한 마음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길을 잃으셨다니, 안타까운 일이오. 보아하니 행색도 단정치 못하신데, 이 밤중에 어디로 가실 참이셨소?" 여인은 고개를 떨구며 말끝을 흐렸다. "이제는… 가야 할 곳도, 저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몸이옵니다." 그 말 한마디에 담긴 절망의 깊이를 짐작한 김진서는 차마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험한 산길에 여인을 혼자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딱한 사정은 내일 아침에 듣기로 하고, 우선은 제 집으로 드시지요. 비록 누추하지만 하룻밤 이슬을 피할 거처는 될 것입니다." 그의 제안에 여인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 생면부지의 사내에게 신세를 질 수 있겠사옵니까. 나리의 고마운 마음만 받겠습니다." "내 어찌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 모른 척하겠소. 나는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 김진서라 하오. 부디 경계심을 푸시고, 염려 마시오." 김진서의 진심 어린 눈빛에 여인은 한참을 망설이다,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월하'라 했다. 달 아래에서 만났으니 월하. 참으로 그녀와 어울리는 이름이라 김진서는 생각했다. 그는 월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좁은 서재에 남녀가 단둘이 있게 되자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김진서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녀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 건넸다. 월하는 두 손으로 찻잔을 공손히 받아 들고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 고상하고 우아한 몸가짐은 필시 양갓집 규수이거나, 그에 준하는 교육을 받은 여인임이 틀림없었다. 김진서는 그녀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슬픔 어린 아름다움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진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김진서는 서책에 단 한 글자도 더 쓸 수 없었다. 그의 온 신경은 곁에 잠든 월하에게로 향해 있었다.
※ 밀애와 깊어지는 의심
그날 이후, 월하는 김진서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밤마다 그의 집을 찾아왔다. 그녀는 낮 동안에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종적을 감추었다가, 어김없이 인적이 끊기고 달이 중천에 떠오를 때면 그림자처럼 나타나 그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김진서는 더 이상 그녀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누구였는지가 아니라, 지금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낮 동안의 적막과 고독은 밤에 찾아올 월하를 기다리는 설렘으로 바뀌었다. 그의 서재는 더 이상 학문을 탐구하는 고독한 공간이 아니었다. 월하의 청아한 웃음소리와 향긋한 난초 같은 체향이 배어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안락하고 비밀스러운 둘만의 공간이 되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졌다. 외로웠던 선비와 상처 입은 여인은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며 뜨겁게 서로를 탐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시를 논하던 것이, 어느덧 밤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 월하의 비단결 같은 옷고름이 스르륵 풀리고, 창호지 너머 스며드는 달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하얀 속살은 김진서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월하의 품은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서늘했고, 그녀의 입술은 꿀처럼 달콤하면서도 깊은 슬픔의 맛이 났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고, 그녀의 슬픔의 근원을 뿌리 뽑아주고 싶었다. 그는 밤새도록 그녀를 품에 안고 사랑을 속삭였고, 월하는 그의 품에서 비로소 안식을 찾은 듯 가만히 몸을 맡겼다. 하지만 이 달콤한 밀애의 시간이 계속될수록, 김진서의 마음 한편에서는 안개처럼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총명한 선비의 이성이 사랑의 열병 속에서도 완전히 잠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월하는 모든 것이 신비에 싸여 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김진서가 내어주는 음식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그저 차나 맑은 술 한 잔을 마실 뿐이었다. "월하, 왜 아무것도 먹질 않는 것이오? 내 정성이 부족한게요?" 그가 걱정스레 물으면, 그녀는 언제나 슬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나리. 그저… 속세의 음식이 잘 받지 않는 체질일 뿐이옵니다. 나리의 마음만으로도 저는 배가 부릅니다." 또한 그녀는 햇빛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동이 트고 여명이 밝아올 무렵이면, 그녀는 늘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조금만 더 있다 가시오. 해가 뜨는 것을 함께 보고 싶소." 김진서가 그녀의 소매를 붙잡아도,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옵니다. 저는 햇빛 아래에서는 숨을 쉴 수 없는 몸입니다." 그리고 가장 기이한 것은, 한여름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늘 서늘했다는 점이다.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조차 그녀의 살결은 갓 길어 올린 우물물처럼 차가웠다. 처음에는 그저 체질이려니 생각했지만, 밤마다 반복되는 서늘함은 김진서의 마음에 불길한 예감을 심어주었다. 어느 날 밤, 김진서는 큰마음을 먹고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월하. 우리는 이리도 깊은 정을 나누는 사이인데, 나는 아직도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소. 당신의 가족은 어디에 있으며, 낮 동안에는 어디서 지내는 것이오? 부디 내게 모든 것을 말해주시오." 그의 진지한 물음에 월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굳어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나리… 저의 과거를 아시면, 필시 저를 멀리하게 되실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깨어지는 것이 저는 두렵습니다. 부디 묻지 말아 주십시오." 그녀의 애원에 김진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이성적인 의심을 덮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비밀을 가슴에 묻어둔 채, 그저 이 위험한 사랑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혹 그녀가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라 할지라도, 귀신이나 여우라 할지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토록 사무치게 사랑하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들 대수랴.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월하를 더욱 깊이 품에 안았다. 하지만 그가 애써 외면했던 의심의 씨앗은, 그의 마음속 가장 어두운 곳에서 조용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싹은 머지않아 핏빛의 끔찍한 진실을 피워낼 운명이었다.
※ 피 묻은 붓글씨
그날 밤도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김진서는 월하의 서늘한 몸을 자신의 체온으로 녹이며 밤이 새는 줄도 몰랐다. 창밖에서 닭 우는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을 때, 그는 잠시 잠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월하와 함께 대낮의 저잣거리를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쏟아졌지만, 그녀는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참으로 행복한 꿈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짧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늘 그렇듯 월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그녀가 누웠던 자리는 이미 냉랭하게 식어 있었고, 방 안에는 그녀가 남기고 간 희미한 난초 향만이 감돌았다. 김진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별은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는 밤새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세수를 하기 위해 대야에 물을 받았다. 차가운 물에 얼굴을 담그자, 간밤의 열기와 꿈의 여운이 가시는 듯했다. 그런데 그가 고개를 들어 서책상을 보았을 때, 그는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평소 그가 아끼는 새하얀 한지 한 장이 서책상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단정하면서도 힘 있는 필체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것은 분명 월하의 필체였다. 그녀는 가끔 김진서를 위해 아름다운 시구를 써주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그는 천천히 서책상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글씨의 색깔이 이상했다. 검은 먹물이 아니라, 검붉은 액체로 쓰여 있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곳은 선홍빛을 띠고 있었고, 방 안에는 비릿한 쇠 냄새가 희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피였다. 누군가의 피로 쓴 글씨였다. 김진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가 그를 덮쳤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종이를 집어 들었다. 종이에서는 아직 온기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 위에 쓰인 글씨를 읽는 순간, 그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대감께서 아셨습니다. 속히 이곳을 떠나 목숨을 보전하십시오. 부디…."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대감? 어느 대감을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왜 나의 목숨을 보전하라고 하는 것인가. 월하, 그녀는 대체 누구이며, 이 피는 또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듯,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손에 들린 피 묻은 종이와,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만이 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방 안을 둘러보았다. 월하가 남긴 다른 흔적은 없는지, 혹시 이것이 누군가의 잔인한 장난은 아닌지. 하지만 방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 순간, 지난밤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늘 슬픔에 잠겨 있던 그녀의 눈빛, 햇빛을 병적으로 피하던 모습, 한여름에도 서늘하기만 했던 그녀의 살결, 그리고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던 기이한 행동들. 그가 애써 외면하려 했던 모든 의심의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지며 끔찍한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피는… 설마. 김진서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종이를 든 채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랑했던 여인이 남긴 마지막 흔적이 차가운 피 묻은 경고문이라니. 이 기막힌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황홀했던 사랑의 기억은 순식간에 섬뜩한 공포로 변해버렸다.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 옥구슬 같던 목소리, 비단결 같던 살결이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진실이었기에 이 마지막 경고를 남기고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누구이며, 어떤 억울한 사연을 가졌기에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자신을 찾아왔던 것일까. 그리고 자신을 위협하는 '대감'은 또 누구란 말인가. 김진서는 피 묻은 붓글씨를 가슴에 품고 한참을 흐느꼈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의 증표가 아니었다. 그의 목숨을 옥죄어 오는 죽음의 예고장이었다. 그의 평온했던 일상은 산산조각 났고, 이제 그는 정체 모를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아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월하의 마지막 선물은 달콤한 사랑의 추억이 아닌, 피로 얼룩진 잔인한 진실이었다.
※ 드러나는 진실
김진서의 머릿속은 지옥과 같았다. 사랑의 속삭임은 비명이 되었고, 황홀했던 기억은 공포로 얼룩졌다. 그는 한나절 내내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월하가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피로 남긴 경고였다. 그 의미를 알아내야만 했다. 그녀의 정체,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대감'이 누구인지 밝혀내야 했다. 정신을 차린 김진서는 남루한 옷으로 갈아입고 삿갓을 깊게 눌러썼다. 그리고는 곧장 저잣거리의 가장 후미진 곳에 있는 주막으로 향했다. 그곳은 온갖 장사치와 왈패들이 모여들어 한양의 모든 소문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이었다. 그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탁주 한 사발을 시키고는, 능청스러운 주모에게 말을 걸었다. "주모, 요새 한양에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있소? 하도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었더니 세상 돌아가는 일을 통 모르겠구려." 주모는 그의 행색을 훑어보더니 이내 안주 접시를 내려놓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재미난 일이야 많지라우. 하지만 선비님 같은 양반이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고…." 김진서는 엽전 몇 닢을 슬쩍 주모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내 입 무거운 건 주모가 더 잘 알지 않소. 혹, 요즘 고관대작들 중에 무슨 궂은일이라도 있었소?" 주모는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김진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있구 말구. 판서 어른 댁에 상(喪)이 났다는 소문, 들었소?" "판서 댁이라니… 어느 판서를 말하는 것이오?" "에이, 선비님도 참. 요즘 판서라면 그 호랑이 같은 윤 판서 어른 말이지 누구요. 그 댁 애첩이 나흘 전엔가 급병으로 죽었다지 뭐요." 윤 판서. 김진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윤 판서는 조정에서도 서슬 퍼런 권세와 잔혹한 성정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밉보인 자는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된다는 흉흉한 소문이 파다했다. 주모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게 그냥 급병이 아니라는 말도 있더이다. 듣자 하니 그 애첩이 워낙 절세미인에 글과 그림에도 능해서 판서 어른이 애지중지했다는데, 어느 날 다른 사내와 정을 통했다는 오해를 사서… 그만…." 주모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말을 맺었다. "매를 맞아 죽었다는 게지. 하도 끔찍하게 죽어서 쉬쉬하며 그날 밤으로 남산 자락에 몰래 묻어버렸다더군. 쯧쯧, 꽃 같은 나이에 가엾기도 하지." 그 순간 김진서의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모든 조각들이 맞춰졌다. 나흘 전. 자신이 월하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남산 자락. 바로 자신의 집 근처였다. 글과 그림에 능한 절세미인. 윤 판서의 잔혹한 성정. 그리고 '대감께서 아셨습니다'라는 월하의 피 묻은 글씨.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졌다. 월하는 윤 판서에게 억울하게 맞아 죽은 바로 그 애첩의 원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윤 판서는 어떤 연유에선지 자신의 혼이 밤마다 다른 사내를 찾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 미친 질투심과 분노를 이제 산 자인 자신에게 돌리려는 것이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주막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주… 주모, 그 여인이 묻혔다는 곳이 대강 어디쯤인지 알 수 있소?" 주모가 가리킨 방향은 그의 집 뒤편, 월하를 처음 만났던 바로 그 대나무 숲 너머의 야산이었다. 김진서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주막을 나섰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산길을 헤치고 그곳에 다다랐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인적 드문 곳에 봉분도 없이 허술하게 파헤쳐진 새 무덤이었다. 비석 하나 없이 흙만 대충 덮어놓은 무덤. 너무나도 처참하고 외로운 모습이었다. 김진서는 그 무덤 앞에 무너져 내렸다. "월하… 월하…! 그대였구려. 이리도 억울하게 가셨구려." 이제야 그녀의 눈에 서려 있던 깊은 슬픔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음식을 먹지 못하고, 햇빛을 피하며, 그토록 서늘한 몸을 가졌는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복수를 위해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죽어서도 잊지 못한 사람의 온기와 정을 그리워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행복마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게 되자,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피로써 경고를 남긴 것이다. 김진서는 흙 무덤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죽은 여인의 애달픈 사랑과, 살아있는 자신에게 닥쳐온 죽음의 그림자가 뒤섞여 그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도망쳐야 한다. 그녀의 마지막 선물이자 유언을 지켜, 살아남아야만 했다.
※ 목숨을 건 탈출
월하의 무덤 앞에서 얼마나 울었을까. 서산으로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사방에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김진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속히 이곳을 떠나 목숨을 보전하십시오.' 월하의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울렸다. 지금 슬픔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윤 판서의 손길은 이미 자신을 향해 뻗쳐오고 있을 터였다. 그는 눈물을 훔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 최소한의 노잣돈과 필묵이라도 챙겨야 했다. 그는 미친 듯이 산을 달려 내려와 자신의 초가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멀리서 보이는 집의 풍경이 이상했다. 늘 새어 나오던 자신의 등불 빛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집 주변의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부자연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짐승이라기엔 너무나도 조용하고 음험한 움직임. 잠복이다. 이미 윤 판서가 보낸 자객들이 집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다. 김진서는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혀 길가의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달빛이 구름 사이로 잠시 얼굴을 내밀었을 때, 검은 복면을 쓴 사내 여럿이 칼을 든 채 그의 집 담벼락과 대문 주변에 숨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모든 것을 버리고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어디로? 막막함에 숨이 막혀올 때, 그의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스쳤다. 월하가 처음 나타났던 뒤뜰의 대나무 숲. 그곳은 집의 담장 중에서도 가장 허술하고, 숲과 바로 이어져 있어 몸을 숨기기 용이한 곳이었다. 월하가 그를 찾아왔던 길이, 이제는 그가 살아나갈 유일한 길이 될지도 모른다. 김진서는 신발을 벗어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고양이처럼 소리를 죽인 채, 담장을 따라 집의 뒤편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자객들의 숨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마침내 대나무 숲 어귀에 다다랐다. 그는 낡은 담장의 일부를 조심스럽게 무너뜨리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성공하는가 싶었던 그 순간, 뒤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파삭'하고 울렸다. "저기다!" 한 자객의 외침과 함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놓치지 마라! 대감의 명령이다. 반드시 산 채로 잡아오라 하셨다!" 횃불이 일제히 밝혀지며 대낮처럼 환해졌고, 사방에서 자객들이 칼을 빼 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김진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대나무 숲 안으로 뛰어들었다. 등 뒤로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쉭! 쉭! 화살들이 그의 귓가를 스치고, 옆의 대나무에 '퍽, 퍽' 박혔다. 그는 앞만 보고 달렸다. 옷이 찢기고 얼굴에 생채기가 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월하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다는 생각만이 그의 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그는 발을 헛디뎌 가파른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자객들의 횃불과 고함 소리는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들은 그가 굴러떨어진 것을 보지 못하고 다른 방향으로 쫓아간 모양이었다. 김진서는 욱신거리는 온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살던 집 쪽을 돌아보았다. 멀리서, 자신의 작은 초가집이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의 책들, 그의 붓, 그의 꿈, 그리고 월하와의 짧았던 추억까지 모두 한 줌의 재로 변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목숨은 건졌다. 그는 불타는 집을 등지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정처 없는 도망자의 길을 떠났다.
※ 죽은 자의 마지막 선물
그 후로 몇 달의 시간이 흘렀다. 김진서는 더 이상 장래가 촉망되던 선비가 아니었다. 그는 이름 없는 절간을 전전하고, 허름한 산장에서 하룻밤을 신세 지는, 초라한 행색의 나그네가 되어 있었다. 윤 판서의 추격은 집요했다. 한양을 떠나 멀리 남쪽 지방까지 내려왔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낮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깊은 산속을 걷고, 밤이 되어서야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인가로 내려왔다. 육신은 고되고 남루했지만, 그의 정신은 이상하리만치 맑고 고요했다. 과거에 대한 미련도, 출세에 대한 욕심도 모두 사라졌다. 그 모든 것이 월하와의 만남과 이별에 비하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품속에는 늘 낡고 해진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월하가 남긴 피 묻은 붓글씨였다. 처음 그것을 발견했을 때의 공포와 충격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밤마다 달빛 아래 그 종이를 펼쳐보았다. 검붉게 말라붙은 핏자국은 이제 그에게 끔찍한 경고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절절하고 순결한 연서(戀書)였다. 그는 종이를 쓰다듬으며 월하를 생각했다. 그녀는 그저 하룻밤의 유희나 원한을 위해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억울한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으로 따뜻한 사랑을 느끼고 싶었던 가여운 영혼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을 알자, 기꺼이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킬 각오로 마지막 경고를 남겼던 것이다. 그것은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어느 깊은 가을밤, 김진서는 지리산 자락의 작은 암자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늙은 노승과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모두 들은 노승은,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선비님은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실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얻으셨소." "스님, 저는 이제 빈털터리 신세일 뿐입니다. 무엇을 얻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緣)을 넘어,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뛰어넘는 참된 사랑을 겪지 않으셨소. 그것은 천만금으로도 살 수 없는 깨달음이지요. 그 여인은 선비님을 살리기 위해 왔던 보살이었을지도 모르오." 노승의 말에 김진서는 가슴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월하는 자신을 파멸시킨 요물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한 존재였다. 그녀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덧없는 욕망의 굴레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었다. 그는 월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녀의 몫까지 살아가야 할 의무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 김진서는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을 멈추었다. 그는 지리산 깊은 곳에 작은 띠집을 짓고, 밭을 일구며 살았다. 더 이상 과거 시험을 위한 글은 쓰지 않았지만, 밤마다 붓을 들어 월하를 위한 시를 짓고 그녀의 넋을 위로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미치광이라 수군거렸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평온하고 행복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이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남긴 피 묻은 경고는, 그렇게 한 남은 자의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 놓은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유튜브 엔딩 멘트
야담 천사 구독자 여러분, 오늘 이야기 즐거우셨나요? 죽음마저 뛰어넘은 한 여인의 애절한 사랑이 한 남자의 목숨을 구한 기이하고도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때로는 이렇듯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승을 떠도는 원혼의 사랑도 이토록 절절한데, 살아생전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또 얼마나 위대할까요?
다음 시간에는 억울하게 죽은 아들을 살려낸 어머니의 눈물, 구전 민담 '효자 설화' 편으로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세상 가장 위대한 사랑 이야기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은 야담 천사에게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