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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 묵은 여우 구슬을 삼킨 아이, 그 후 벌어진 신기한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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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만약 당신의 아이가 천년 묵은 구미호의 구슬을 삼켰다면? 매일 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아이를 찾아오는 여우. 그녀는 아이의 입술을 탐하며 구슬을 되찾으려 하는데… 아이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아슬아슬한 유혹이 지금 시작됩니다.

    디스크립션

    깊은 산 속, 순진한 아이가 우연히 삼켜버린 여우 구슬. 그날 이후 아이는 천하를 꿰뚫어 보는 지혜를 얻게 되지만, 구슬을 되찾으려는 천년 묵은 구미호의 집요하고도 위험한 유혹이 시작됩니다. 아이를 지키려는 스승과 구슬을 되찾으려는 여우의 팽팽한 대결! 그 결말을 이야기 천사가 들려드립니다.

    ※ 깊은 산 속, 푸른빛의 유혹

    조선 어느 고을, 깊고 깊은 산중에 자리한 작은 서당이 있었습니다. 속세와는 담을 쌓은 듯 고즈넉한 이곳에서, 열 살 남짓한 학동 ‘이선’은 밤늦도록 책장을 넘기고 있었죠. 또래 아이들이라면 벌써 곯아떨어졌을 시간이건만, 이선은 유독 학문에 대한 욕심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외로움도 많이 탔지요. 창밖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고, 멀리서 들려오는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밤의 적막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촛불 아래 드러난 자신의 긴 그림자를 보며, 이선은 문득 서글픈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창호지 너머로 섬광처럼 푸른빛이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 이선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반딧불이라기엔 너무나 크고 영롱한 빛이었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숲 속 깊은 곳을 향해 꼬리를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죠. 아이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 빛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하늘에서 떨어진 별 조각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책에서만 보던 신선이 나타난 것일지도. 이선은 홀린 듯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습니다. 스승님께 들키면 호되게 야단을 맞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 푸른빛의 유혹은 아이의 두려움을 잊게 할 만큼 강렬했습니다. 이선은 작은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 조심스럽게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발밑에서는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고, 서늘한 밤공기가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빛이 멈춘 곳에 다다르자 이선은 숨을 헙, 들이켰습니다. 그곳에는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거대한 은행나무 아래, 소복처럼 하얀 비단 옷을 입은 여인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나는 얼굴, 칠흑같이 검고 긴 머리카락이 땅 위로 흩어져 있는 모습은 마치 그림 속 선녀가 현실로 나타난 듯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몹시 괴로운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죠. “저… 괜찮으십니까?” 이선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지만, 여인은 대답할 기력조차 없는 듯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스럽게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여인이 심하게 기침을 하더니 입에서 무언가를 툭, 하고 토해냈습니다.

    그것은 밤하늘의 별을 모두 담아 놓은 듯, 영롱한 푸른빛을 발하는 구슬이었습니다. 이선을 이곳까지 이끈 바로 그 빛이었죠. 구슬은 여인의 입에서 떨어져 나와, 이선이 있는 쪽으로 데구루루 굴러왔습니다. 이선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구슬을 집어 들었습니다. 손안에 닿는 감촉은 차가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고 매끄러웠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작은 심장이 손바닥 위에서 뛰고 있는 듯한 신비한 온기였죠. 이선이 구슬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있을 때, 쓰러져 있던 여인이 희미하게 눈을 뜨고는 이선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그 눈빛에는 간절함과 함께 무언가 섬뜩한 집념이 서려 있었죠. 겁에 질린 이선은 뒷걸음질 치다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손에 쥐고 있던 구슬을 저도 모르게 꿀꺽, 삼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구슬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온몸에 짜릿한 전기가 흐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여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저 스산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만이, 방금 전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죠.

    ※ 사라진 구슬, 천년의 분노

    이선이 사라진 숲의 반대편, 거대한 바위 동굴 속. 한 여인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선녀 같은 자태를 뽐내던 그 구미호였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웠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해졌고, 비단 같던 머리카락은 마른 지푸라기처럼 푸석해졌죠.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끔찍한 탈력감에 사지가 제멋대로 떨렸습니다. 그녀는 차가운 동굴 바닥에 엎드린 채,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켰습니다. 사라졌다. 나의 구슬이. 나의 도력이… 나의 천년이…!

    그 구슬은 평범한 구슬이 아니었습니다. 천 년 동안 달의 정기를 받아가며 쌓아 올린, 그녀의 힘의 원천이자 생명의 정수(精髓)였습니다. 인간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요기(妖氣)를 다스리려다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찰나의 순간,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구슬을 입 밖에 내놓았는데, 하필 그 순간을 한낱 미물에 불과한 인간 아이에게 들키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감히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구슬을 삼켜버렸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안에서 슬픔과 허탈감은 이내 지독한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크아아아악!” 그녀의 입에서 더 이상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짐승의 것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등 뒤로 아홉 개의 거대한 꼬리가 불꽃처럼 타오르며 솟아났습니다. 동굴 전체가 그녀의 분노에 찬 요기로 진동하며 바위 부스러기를 후두둑 떨어뜨렸죠.

    그녀는 이를 갈았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아이의 배를 갈라 구슬을 꺼내고, 심장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죠. 구슬은 아직 아이의 몸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만약 아이가 죽는다면, 구슬에 담긴 천 년의 도력 역시 오염되거나 소멸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아이를 살린 채로, 제 발로 구슬을 토해내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흩어졌던 정신을 가까스로 그러모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자신의 몸속에 있었던 구슬의 흔적에 집중했습니다. 희미했지만, 분명한 연결고리가 느껴졌습니다. 구슬은 아직 살아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습니다. 아홉 개의 꼬리는 다시 스르르 사라졌고, 그녀는 창백하지만 다시금 인간의 아름다운 형상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전의 신비로움 대신, 먹이를 놓친 맹수의 잔혹함과 집요함으로 번뜩이고 있었죠.

    “찾아내야 한다. 반드시… 내 구슬을… 내 모든 것을 되찾아야만 해.” 그녀는 동굴 밖으로 나섰습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습니다. 그 모습은 더 이상 상처 입은 여인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서슴지 않을 위험한 사냥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녀의 코끝이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섞여 있는, 자신의 도력이 담긴 구슬의 냄새를 좇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냄새는 이선이 머물고 있는 산사의 서당을 향해 분명하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녀의 붉은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며, 소름 끼치도록 아름답고도 잔인한 미소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막 시작된, 이 길고도 위험한 술래잡기의 술래는 정해졌습니다.

    ※ 기이한 동거, 여인의 속삭임

    구슬을 삼킨 다음 날, 이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간밤의 일은 그저 무서운 꿈이었으려니 애써 생각하려 했죠. 하지만 몸은 평소와 달랐습니다. 늘 아침마다 무겁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고, 머리는 서늘할 정도로 맑았습니다. 어젯밤 읽었던 어려운 글귀들이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머릿속에서 명확하게 정리되는 기이한 경험을 했죠. 이선이 자신의 변화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서당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스승과 낯선 여인의 목소리였습니다. 이선이 빼꼼히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자, 그곳에는 간밤에 보았던 바로 그 소복의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여인은 어젯밤의 창백하고 위태로운 모습과는 달리, 단아하고 기품 있는 과부의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한양에서 피난길에 오른 미망인이온데, 산길에서 그만 도적을 만나 모든 것을 잃고 이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하룻밤만이라도 좋으니,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녀의 목소리는 청아했고, 그 모습은 너무나도 애처로워 차마 거절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인자한 성품의 스승은 딱한 사정을 외면하지 못하고, 서당의 작은 행랑채를 내어주며 그녀가 머무는 것을 허락했죠. 그렇게 구미호와 아이의 기이하고도 위험한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여인은 낮 동안에는 조용히 행랑채에 머물며, 바느질을 하거나 스승과 이선의 시중을 드는 등 흠잡을 데 없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선은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녀의 온화한 미소와 상냥한 말투에 점차 경계심을 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찾아오면, 여인은 전혀 다른 존재로 변했습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여인은 소리 없이 자신의 처소를 빠져나와 이선이 잠든 방으로 향했습니다. 사뿐사뿐, 고양이처럼 가벼운 걸음걸이. 그녀는 문고리를 잡지 않고도, 마치 연기처럼 스르르 문틈을 통과해 방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방 안에는 색색거리며 깊은 잠에 빠진 이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여인은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아, 오랫동안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 눈빛에는 연민 따위는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보물을 품고 있는 작은 상자를 어떻게 열어야 할까, 고심하는 듯한 차가운 계산만이 번뜩일 뿐이었죠. 그녀는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손을 뻗어, 아이의 통통한 볼을 살며시 쓸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의 배 위로 손을 옮겼습니다. 자신의 구슬이 잠들어 있는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손바닥을 통해 희미하게 느껴지는 구슬의 온기와 도력에, 그녀는 잠시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몸을 숙여, 잠든 아이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습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꿀처럼 달콤하면서도 독처럼 차가운 향기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아가… 착한 아가… 네 것이 아니잖니. 어서 돌려주렴. 입을 벌려 보거라… 그래, 착하지…” 그녀의 속삭임은 자장가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사람의 정신을 홀리는 강력한 주술의 힘이 담겨 있었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이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습니다. 아이는 꿈속에서 아름다운 누이가 나타나, 자꾸만 자신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 하는 기이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 입맞춤이 어쩐지 두렵고 섬뜩하게 느껴져, 아이는 꿈속에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죠. 아이의 무의식적인 저항에, 여인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습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사냥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까요. 매일 밤, 매일 밤, 이렇게 찾아와 속삭이고 유혹하다 보면, 언젠가는 저 단단히 닫힌 조개껍데기 같은 입술이 열릴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아이의 배를 한번 지그시 눌러본 뒤, 아쉬움을 남긴 채 연기처럼 방을 빠져나갔습니다. 이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식은땀을 흘리며 뒤척일 뿐이었습니다.

    ※ 하늘의 지혜를 얻은 아이

    여인의 은밀한 방문이 계속되던 어느 날 아침, 이선은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기이한 상쾌함을 느꼈습니다. 밤새도록 누군가와 씨름이라도 한 듯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지만, 정신은 안개 걷힌 가을 하늘처럼 맑고 투명했죠. 그날은 마침 스승이 학동들을 모아놓고 ‘대학(大學)’의 한 구절을 강독하는 날이었습니다. 스승은 학동들의 학문적 깊이를 시험해보고자 가장 난해한 구절을 들어 질문을 던졌습니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참된 의미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각자 자신의 견해를 말해보거라.” 서당 안은 순간 침묵에 휩싸였습니다. 이제 막 글공부를 시작한 어린 학동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질문이었죠. 다들 고개를 숙이고 쩔쩔매고 있을 때, 이선이 조용히 손을 들었습니다.

    스승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선을 바라보았습니다. 평소의 이선이라면 대답은커녕 질문의 의미조차 이해하기 어려웠을 터. “오, 이선이냐. 그래, 어디 한번 말해보거라.” 이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의 막힘도 없이 입을 열었습니다. “스승님, 격물치지란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앓에 이른다는 뜻으로 배웠습니다. 허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의 목소리는 어린아이의 것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결코 어리지 않았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파고든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지식으로 아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길가에 핀 풀 한 포기의 이치를 알려면,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비와 바람을 맞으며 자라나, 마침내 꽃을 피우고 시드는 전 과정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세상 만물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사옵니다. 저 멀리 나는 새의 날갯짓이 연못에 이는 물결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음을 아는 것, 그리하여 세상 만물을 내 몸과 같이 여기고 그 속에서 나의 위치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격물치지의 참된 경지가 아닐까 하나이다.”

    서당 안은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스승은 입을 벌린 채 이선을 바라보았죠. 방금 전의 말은 열 살 남짓한 아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수준의 깨달음이 아니었습니다. 평생을 학문에 정진한 노학자도 쉽게 이르지 못할 깊이 있는 통찰이었죠. 다른 학동들 역시 놀라움과 질투가 뒤섞인 눈으로 이선을 쳐다보았습니다. 이선 자신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읊었을 뿐이었습니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었죠. 그날 이후, 이선의 비범함은 계속해서 드러났습니다. 며칠 뒤 맑은 하늘을 보며 “오후에는 큰 비가 내릴 것이니, 뒤뜰의 볍씨를 걷어두어야 합니다.”라고 말했고, 그의 말대로 그날 오후에는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스승의 오랜 지병인 기침의 원인이 약초의 잘못된 배합에 있음을 지적하고 새로운 처방을 내놓자, 신기하게도 스승의 기침이 멎기도 했습니다. 아이는 이제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 지혜가 깊어질수록, 이선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행랑채에서 지켜보는 여인의 붉은 입술에는, 만족감과 초조함이 뒤섞인 기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습니다. 자신의 구슬이 가진 힘이 아이를 통해 발현되는 것은 즐거웠지만, 동시에 자신의 정수가 저 하찮은 인간의 몸 안에서 멋대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 스승의 경고, 드러나는 정체

    이선의 기이한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스승의 마음속에는 의심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지혜는 ‘깨달음’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오래된 책을 그대로 베껴 읽는 듯, 경험과 연륜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날것의 지식이었죠. 그것은 비정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정상적인 변화는, 정확히 저 미망인이라는 여인이 서당에 머물기 시작한 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스승은 수십 년간 쌓아온 자신의 연륜과 직감을 통해, 저 여인이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람의 간을 빼먹는다는 여우, 혹은 그보다 더한 요물일지도 모른다. 스승은 이선을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불렀습니다.

    “이선아.” 스승은 평소보다 더욱 자애로운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너를 보니 요즘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스승으로서 기쁘기 그지없다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구나. 혹, 밤에 잠은 잘 자느냐? 무서운 꿈을 꾸지는 않고?” 이선은 스승의 질문에 잠시 망설였습니다. 매일 밤 꿈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누이. 처음에는 신비롭고 설레는 꿈이라 생각했지만, 밤이 거듭될수록 그 누이가 자신의 입술을 집요하게 탐하려 하는 것이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선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꿈 이야기를 스승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았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스승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져 갔습니다.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선의 지혜를 키워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의 몸속에 있는 무언가를, 아마도 아이의 정기(精氣)나 영혼을 빼앗기 위해 밤마다 유혹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선아. 내 말을 잘 듣거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그 누구에게도 해서는 아니 된다. 특히, 저 행랑채의 부인에게는 더더욱.” 스승은 목소리를 낮추고 이선의 귀에 속삭였습니다. “그 여인은 사람이 아니다. 필시 천 년 묵은 여우가 둔갑한 요물일 것이다. 아마 너는 그 요물의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하구나. 밤마다 너를 찾아오는 것은 그것을 되찾기 위함이다.” 이선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습니다. 간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니, 그 아름다운 누이가 사람을 해치는 여우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죠. 스승은 떨고 있는 아이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습니다. “두려워 마라. 이 늙은 스승이 너를 반드시 지켜줄 것이다. 허나 그러기 위해선, 먼저 저 요물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내야만 한다.” 스승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천 년 묵은 여우는 능히 둔갑술을 부려 사람을 홀리나, 오직 개(犬) 가죽 타는 냄새와 그 울음소리만큼은 피하지 못한다. 그 냄새는 여우의 요력을 어지럽히고, 그 울음소리는 여우의 심장을 찢어놓기 때문이지.’ 스승은 결심했습니다. 내일, 저 여인을 시험해 보리라. 그는 창고 깊숙한 곳에 보관해 두었던 사냥개 가죽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을의 가장 사나운 사냥개 몇 마리를 빌려, 서당 주변에 몰래 숨겨두라고 일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서당에는 폭풍전야와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 선택의 기로, 구슬의 주인

    다음 날 아침, 스승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인을 자신의 방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했습니다. “부인, 그간 서당에 머물며 아이들을 돌봐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약소하지만 차나 한잔 받으시지요.” 여인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깊고 고요했죠. 하지만 그녀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순간, 스승의 등 뒤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맡고는 손을 멈칫했습니다. 연기 속에서 역하고도 기분 나쁜 냄새가 섞여 나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스승이 밤새 몰래 태우고 있던 사냥개 가죽 냄새였습니다. 여인의 낯빛이 순간 창백하게 변했습니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찻잔을 내려놓았죠. “스승님, 방안에 무슨 냄새가 이리 지독합니까. 머리가 아파오는군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스승의 신호를 받은 하인이 서당 마당에 숨겨두었던 사냥개들을 풀어놓았습니다. “컹! 컹컹! 크르르릉!” 수십 마리의 개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짖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방 안까지 쩌렁쩌렁 울리자,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습니다. 더 이상 우아하고 기품 있는 미망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렸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등 뒤로 감춰져 있던 아홉 개의 거대한 꼬리가 불쑥 튀어나와 방 안을 어지럽게 휘저었습니다. 정체가 탄로 난 것입니다. “네 이놈, 요망한 여우야! 감히 신성한 학문의 전당에 발을 들여놓고 순진한 아이를 홀리려 해! 썩 물러가지 못할까!” 스승이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호통을 쳤습니다.

    궁지에 몰린 구미호는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흉측한 몰골로 이선을 향해 돌아섰습니다. 그녀의 눈은 핏빛으로 충혈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를 돌려다오! 아니, 아이 몸속에 있는 내 구슬을 돌려다오! 그것은 내 천 년의 세월이자, 나의 목숨이다! 저 아이가 계속 구슬을 품고 있으면, 머지않아 구슬의 강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온몸의 피가 말라 죽게 될 것이다!” 그녀의 절규는 위협이자, 동시에 처절한 애원이었습니다. 이선은 공포에 질려 스승의 등 뒤로 숨었습니다. 스승은 이선을 감싸 안으며 구미호를 향해 맞섰습니다. “요망한 것! 네 구슬을 돌려주는 방법은 있다. 허나 그 지혜 또한 사라지고, 이선이는 평범한 아이로 돌아가야만 한다.” 스" 이선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한쪽은 천하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 보는 비범한 지혜, 하지만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다른 한쪽은 아무것도 모르던 평범한 아이로 돌아가는 것. 비록 답답하고 더딘 삶일지라도, 안전하고 평화로운 길이었습니다.

    이선은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세상의 모든 지식이 소용돌이쳤지만, 가슴속에서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산과 들을 뛰어놀던 평범한 나날, 스승의 꾸지람을 들으며 투덜대던 소박한 일상. 그것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삶이었습니다. 이선은 눈을 뜨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스승님, 저는… 평범한 이선이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구미호는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구슬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빛을 발했습니다. 스승은 미리 준비해 둔 약탕을 이선에게 건넸습니다. 이선이 약을 마시자, 극심한 고통과 함께 목구멍으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역류해 올라왔습니다. ‘툭’. 이선의 입에서 영롱한 푸른빛의 구슬이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구미호는 번개같이 달려들어 자신의 구슬을 물고, 한 줄기 바람처럼 서당을 빠져나가 숲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구슬이 빠져나간 이선은 그 자리에 쓰러져 며칠 밤낮을 앓았지만, 이내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다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신비한 지혜는 모두 사라지고, 다시 예전의 평범하고 조금은 둔한 학동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천하를 꿰뚫는 지혜와 평범한 삶. 소년은 결국 인간 본연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소년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다음 주, 이야기 천사에서는 한 남자를 향한 지독한 사랑과 복수, 역사 뒤에 숨겨진 기생 논개의 진짜 이야기를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어우야담이 기록한 그녀의 비극적인 영웅담, 절대 놓치지 마세요. 구독과 좋아요는 더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큰 힘이 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천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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